폭음과 섬광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화약 터지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때렸다. 멀리 붉은 깃발을 든 누런 솜옷 차림의 적군 수백 명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적군은 금세 참호까지 들이닥쳤다. 아군과 적군의 몸이 뒤엉켰고, 백병전이 벌어졌다.

26일 오전 11시30분께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프랑스 참전기념비 앞 공터 앞에선 육군 제20 기계화보병사단 소속 병사 1000여 명이 실감나는 모의전투를 연출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유엔 연합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했던 '지평리 전투' 상황을 재연한 것이다.

7군단이 당시를 재현한 것이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를 미 제23연대와 이에 배속된 프랑스군 1개 대대, 한국군 1개 중대가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낸 전투. 유엔연합군이 중공군을 최초로 물리친 전투로 '2월 공세'를 편 중공군의 예봉을 꺾었다.

그리고 연합군이 2차로 반격하는 발판을 마련, 전쟁의 흐름을 돌려놨다. 퓰리처상 수상자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저서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에서 "지평리의 승리가 없었다면 미군은 한국을 포기하려 했을 것이다.

 미군은 낯선 중공군을 격퇴하는 전술과 자신감을 체득했다"고 적었다. 사방이 적군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상태에서 동심원 형태로 진지를 구축해 '사주방어(All Around Defence)'를 펼쳐 승리한 지평리 전투의 사례는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유사한 작전을 벌여 승리한 '발지 전투'에 비견된다.

"그때 전투와 정말 똑같습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레이몽 부나(82) 당시 프랑스 대대 중위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이날 행사엔 프랑스·미국의 참전용사 133명이 참석했다. 대부분이 80대 노인인 그들은 베레모를 썼다.

 그 아래로 은발이 반짝였다. 보청기를 착용한 이들도 제법 있었다. 이날 바람이 무척 세찼다. 하지만 노병들은 끄떡없었다. 그들은 '지평리 전투'가 재연되는 30분 내내 자리에서 일어서서 지켜봤다.

1951년 2월 13~15일 지평리엔 중공군이 끝도 없이 몰려왔다. 자크 그리솔레(82) 당시 프랑스 대대 중위의 기억은 선명했다. 그는 "혹독한 추위였다. 적군을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그들은 자꾸 나타났다. 참으로 힘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중공군의 병력은 연합군의 6배였다. 폴 프리먼 중령이 이끄는 미군 제23연대와 이에 배속된 프랑스군 1개 대대, 한국군 1개 중대가 중공군 3개 사단에 둘러싸였다.

연합군은 지평리를 사수해야 했다. 동부전선의 요충지인 그곳이 무너지면 연합군으로 동서로 나뉘어 고립될 판이었다. 원형으로 진지를 구축한 연합군은 사흘 밤낮을 수적으로 절대 우세인 중공군과 싸워 이겼다.

당시 미 23연대 A중대 3소대장이었던 윌리엄 걸리번 예비역 중령은 전투 재연을 지켜보면서 "6·25 때 '철의 삼각지' '펀치 볼' '단장의 능선' 전투를 다 치렀지만 가장 격렬했던 건 지평리 전투"라고 회고했다.

재연 행사는 프랑스 1개 대대가 사수했던 지역이다. 이날 현장에서 당시 58세의 나이로 프랑스 대대를 지휘했던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영상이 상영되자 참석자들은 숙연해졌다. 장군은 전투 때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1964년 사망했다.

몽클라르 장군은 '드골상'을 받은 제1·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그는 중장이었다. 프랑스가 국내 사정으로 한국에 1개 대대만 파병하기로 결정하자 몽클라르는 "중령 계급을 달고 대대장으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나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다. 중령이라도 좋다. 곧 태어날 아이에게 아버지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최초의 유엔군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 대대는 미군 제23연대에 배속됐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의 백전 노장 몽클라르는 중공군을 진지 내부로 끌어들이는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적이 20m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가 공격신호를 내렸다.

손으로 돌리는 사이렌을 울리며 일제히 돌격하는 프랑스군을 맞닥뜨린 중공군은 당황했다. 중공군들은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동여맨 채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는 프랑스군의 기세를 제압하지 못했다.

자크 브탕(87) 프랑스 참전용사회 대표는 "지평리 전투는 자유가 위협받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기로 서약한 프랑스군, 자유를 위해 행동에 나서는 미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선 한국군이 거둔 위대한 승리"고 정의했다.

 브탕 대표는 행사에 참석한 고등학생들을 바라보며 "여기 참석한 미래의 세대들에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미군 참전용사 안내를 맡은 강동이(17·한국외국어대 부속 외고 영어과 2학년)양은 "전투 장면을 보면서 전쟁이란 무엇인지, 자유란 무엇인지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참전용사들은 천안함 침몰 사건과 한반도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브탕 대표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한국 국민은 자부심을 가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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